[전병욱 칼럼] 입장을 달리해서 보라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네 다리를 모두 다친 여우를 보았다고 한다. 야생동물이라 다리를 다치면 사냥을 못해서 굶어 죽는다. 며칠 후 같은 장소에 갔더니 여전히 여우는 살아 있었다. 궁금해서 숨어서 기다렸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제 여우는 죽었구나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여우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와 신기하다. 하나님이 다리 다친 여우도 저렇게 먹이시는구나"라고 감탄했다. 굳은 확신이 생긴 이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이 먹여줄 것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울 것을 믿고 누워만 지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고, 굶어 죽었다. 죽고 난 후 천국에서 하나님께 항의했다. "왜 내게는 호랑이를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대답했다. "왜 너는 호랑이의 본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우의 본을 받으려고 하느냐?"

편협한 사람은 모든 사건과 이야기를 자기 입맛대로만 해석한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한다. 성숙한 사람은 입장을 달리해서 볼 줄 아는 눈이 있다. 입장을 달리해서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고, 막힌 곳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예를 하나 더 보자.

형이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멋진 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새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알고 지내는 어린아이를 만났다. "아저씨, 새 자동차 사셨네요?" "아니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형이 선물로 사주었어." "정말 부러워요." "너무 부러워하지마. 너도 장차 크면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을 날이 올거야." 아이가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선물받은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자동차를 선물해줄 수 있는 형님이 부러운 거예요. 나도 커서 동생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주는 형이 될 거예요." 무엇을 부러워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는 달라진다. 편협한 사람은 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해서 보는 사람은 더 큰 섬김을 위해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어린아이를 교육할 때 너무 해석을 많이 가르치면 안된다. 해석이란 기성세대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해석을 강하게 가르치면, 입장을 달리해서 보는 눈이 죽는다. 유대인들은 12세가 될 때까지 해석을 가르치지 않고 그냥 '이야기'(storytelling)만 반복적으로 전한다. 요셉, 모세, 다니엘의 이야기를 적어도 500번은 듣는다. 그러면 자기가 다니엘인지, 다니엘이 자기인지 혼동이 일어난다. 사자굴에 들어간 것 같은 위기를 맞는다. 해석이 이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힘이 그를 이기게 만든다. 자신이 다니엘이 되어서 사자굴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창의적인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홍해 같은 장애가 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이다. 모세의 이야기로 무장한 사람은 이전의 방법에서 답을 찾지 않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 길을 열어간다. 이것이 교육의 힘이다. 자기 주장만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입장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통합의 힘과 새로운 돌파력은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목사>

by 로스 | 2009/06/25 07:37 | 전병욱 칼럼 | 트랙백 | 덧글(0)

[전병욱 칼럼] 백설공주 후편

믿음은 최종 승리를 확신한다. 과정에 관계없이 승리하는 통합의 삶을 믿는다.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는다. 통합의 삶의 반대는 분열의 삶이다. 분열의 삶을 선악과의 삶이라고 한다. 선악과의 삶은 이원론의 삶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지나치게 드러내려고 한다. 나쁜 것은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가면의 삶, 위장의 삶, 허위의 삶을 산다. 이러다 보니 겉사람만 꾸미게 된다.

좋은 것이란 내 뜻대로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은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분열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재앙이다. 생긴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외모에 대해서 재앙임을 느낀다. 내 뜻대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 뜻대로 취직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원망이다. "왜 내 환경이 이 모양이야, 왜 내 부모는 이 모양이야, 왜 내 결혼은 이 꼴이야"라고 한탄한다.

반면에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룸을 믿는다. 좋은 것은 누리고, 나쁜 것은 용납할 줄 안다. 결국은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낭비같이 보이는 삶의 부분도 통합해서 인식한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외국에서 허랑방탕했다. 허비한 인생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밑바닥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가치를 깨닫는다. 이것이 어찌 낭비일 수 있는가?

여성 영웅을 다룬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많은 사람이 여성 영웅을 다룬 천추태후, 자명고보다 선덕여왕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왜? 어려움을 당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기, 험난함,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합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통합이 스토리를 탄탄하게 하기 때문이다. 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진실의 재발견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어려움은 가치없는 것이 아니다.

백설공주 후편 시리즈가 있다. 이런 식의 이야기이다. 왕자와 백설공주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왕자는 "우리 후계자가 될 거야"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키가 자라지 않는다. 백설공주를 바라보고 '혹시 난쟁이와…'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자 백설공주가 '뜨끔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런 유치한 이야기도 있지만,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계모가 거울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를 물었다. 백설공주라고 하자 독이 든 사과를 먹여서 백설공주를 죽인다. 일곱 난쟁이가 유리관에 넣고 보관한다. 왕자가 와서 키스를 하고 깨어나자 백설공주는 왕궁으로 간다. 왕궁에 있는 거울에 백설공주가 묻는다.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나를 사랑하니?" 당연히 왕자인 줄 알았는데, "숲속의 난쟁이 중 누구"라고 거울은 대답한다. 난쟁이는 깨어나면 백설공주를 잃을 것을 알았다. 왕자님이 키스하면 빼앗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백설공주를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왕자를 소개하고 왕자가 데려가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백설공주는 진실한 사랑이 난쟁이임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어려움은 이면에 숨은 사랑을 보여준다. 분열의 관점에서 나쁜 것,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통합의 삶을 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는 사람은 삶이 두렵지 않다. 삶의 매순간이 깨달음과 감동으로 다가올 뿐이다.

<삼일교회 담임목사>

by 로스 | 2009/06/18 07:23 | 전병욱 칼럼 | 트랙백 | 덧글(0)

[전병욱 칼럼] 기다림의 성숙

성숙한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 추수까지 기다린다.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 초조하다. 그래서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초조함은 불안에서 나온다. '내가 잘될까, 안될까, 어디로 갈까, 어느 줄을 설까?' 항상 초조하다. 사람들로부터 조금 안 좋은 말을 들으면 불안해서 못 견딘다. 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어줘야 성장한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회개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과거 죄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다만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같이 식사하자는 제안만 했다. 집에 들어가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유대 문화에서는 상대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삭개오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누어주겠다고 말한다. 변화된 것이다. 성장한 것이다. 믿어주고 기다려주니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일단 상대를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름이 있는 상대를 못살게 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사랑이란 너를 너로 허용하는 것이다. 요즘 개그 프로에서 '내비둬'라는 코너가 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의미심장하다. 상대가 내 눈에 차지 않더라도 그냥 놔두면 안되겠는가? 하나됨을 얻기 위한 첫 단계는 관용이다. 그냥 내버려두라. 자기 주장을 외치는데 혈안이 되었던 1960∼70년대에 비틀즈는 'Let it be'라는 노래를 불렀다. Let it be는 발음과 뉘앙스도 '내비둬'와 거의 비슷하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냥 내비둬.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을 때도 그냥 내비둬.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냥 내비둬. 헤어진다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만나게 된다. 그냥 내비둬."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가 망할 것을 몰라 집에서 내보냈겠는가? 알았지만, 헤맬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준 것이다. 사랑이란 말씀을 심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의 중심에는 인본주의적인 자기 교만이 있다. 내가 움직이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뭘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뢰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런 깊은 기다림이 있을 때 열매를 맺게 된다. 야곱의 인생은 초반엔 기다리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머리를 짜내 팥죽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아낸다. 모두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이룬 일이다. 야곱은 이런 행동을 통해 뭘 얻었는가? 결국 쫓기는 인생이 되었고, 외지에서 외로운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반면에 그의 아들 요셉은 13년의 오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다렸다. 자기가 한 일은 거의 없어 보이는데,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바닥에서 애굽의 총리까지 영향력의 사람이 되었다. 사랑하고 기다리라. 형제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마라. 너를 허용해야 나도 허용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설득과 대화, 그리고 시간의 테스트를 통해 자라나는 모습을 기다리라.

<삼일교회 담임목사>

by 로스 | 2009/06/11 07:53 | 전병욱 칼럼 | 트랙백 | 덧글(0)

[전병욱 칼럼] 애착에서 나오는 상처

상처는 애착에서 나온다. 애착을 버리면 아픔도 없다. 남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고 말하면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고 말하면 크게 상처 받는다. 왜? 여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남자보다 더 크게 애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스스로 애착을 갖는 부분을 멸시해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발버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각한 공격도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초연한 성도의 삶의 이유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사역을 하다 보면, 점점 자기를 부인하는 쪽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점점 성화되어 간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해 보면, 다르게도 설명할 수 있다. 사역의 규모가 커지다 보면, 오해하는 사람, 시기심으로 공격하는 사람 등이 많아진다. 자기 자존심, 자기 체면, 자기 교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서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나중에는 피하게 된다.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피하는 길이 무엇인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적의 공격조차도 나의 성숙과 나의 변화에 촉매 작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그래서 나쁜 상황이라고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항상 복음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일 수 있는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가 자기 의를 붙들고, 자기 주장으로 서 있었다면, 과연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배경이 좋지 않았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제일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그의 사도성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부인이 없었다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어려움과 공격조차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왜 글을 쓰는가? 삶이 고통스러워서 글을 쓴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고민할 것이 없다. 고민 없이 나오는 글은 빈껍데기이다. 고통이 주는 영감이 있다. 고통이 축복이다. 10년 전 쯤에 처음으로 특별새벽기도회를 했다. 당시 다룬 본문이 사사기이다. 사사기 12장에는 입산, 엘론, 압돈 등 별 의미없어 보이는 사사들의 일대기가 묘사되어 있다. "입산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 "엘론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라는 식의 단순한 묘사만이 반복된다. 설교할 때는 피하고 싶은 본문이 있다. 그러나 연속 설교는 피할 수 없다. 옆의 종이에 계속 인사이트를 써 내려 갔다. "입산, 할 말이 없다." "엘론, 할 말이 없다." "압돈, 할 말이 없다." 도저히 그 본문으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는 인사이트가 생겼다. 그때 했던 설교 제목이 '할 말이 없는 인생을 살지 말자'였다. 어떤 상황도 나쁜 상황은 없다. 정직하게 부딪히면, 그 나쁜 상황 속에서도 가치 있는 열매들은 나오게 돼 있다.

<삼일교회 담임목사>

by 로스 | 2009/06/04 08:14 | 전병욱 칼럼 | 트랙백 | 덧글(0)

[전병욱 칼럼] 인물은 온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는 선배 중에 자신은 인물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분이 계신다. 교회의 후계자를 키우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한다. 선배지만 조심스럽게 한마디했다. "인물은 키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은 스스로 크는 것입니다." 인물은 콩나물 키우듯이 물 준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다. 인물은 온갖 난관을 뚫고 생존하면서 스스로 크는 것이다. 앞선 지도자가 할 일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또 충분히 인물로 성장했을 때, 인물로 인정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젊은이들 가운데 꼭 읽어야 할 좋은 책 목록을 달라는 사람이 많다. 필독서를 알고, 필독서만 읽겠다는 뜻이다. 나쁜 의도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필독서를 친절하게 소개해주지 않는다. 왜? 필독서는 소개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독서는 자신이 스스로 읽어서 찾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필독서를 알 수 있는가? 일단 많이 읽어야 한다. 좋지 않은 책을 수없이 많이 읽어봐야 무엇이 좋은 책인지를 알게 된다. 쓰레기통에 넣을 20권의 책을 읽어야 필독서 1권 정도를 찾아내는 것이다. 좋은 책은 나쁜 책을 알아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변별력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좋고 나쁨을 찾는 것을 남에게 맡기지 마라. 주도권을 잃은 사람을 인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후배 목회자들이 평생 새벽 기도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길을 묻는다. 보통 영적인 능력, 또는 체력의 필요성에 대해서 묻는다. 거의 매일 새벽 기도를 빠짐없이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력과 체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이라면, 4시가 아니라 3시라도 새벽에 나올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매일 새벽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평상시 독서의 능력에서 나온다. 많은 독서량이 없이는 절대로 많은 설교를 감당할 수 없다. 젊어서부터 많은 독서 능력을 기르지 않은 사람은 많은 콘텐츠의 전달을 감당할 수 없다. 독서의 능력이라는 기본기를 갖추어야 한다.

정부에서 벤처기업 육성 정책이라는 것을 내놓는다. 나는 실소한다. 벤처기업은 키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벤처기업은 도와주면 망하는 것이다. 벤처기업은 거친 광야로 가야 한다. 그래서 99%는 죽어야 한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1%가 생명력을 가지고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기업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물이 클 수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인가? 많은 젊은이들이 도피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을 무서워한다. 현장을 두려워한다. 위축된 젊은이들을 삶의 현장으로 이끄는 것이다. 대학 강의실에 숨어 있는 젊은이들을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실과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실은 매정하다. 현실은 무섭다. 현실이라는 거친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낙오된다. 계속해서 낙오되는 사람은 따뜻함으로 품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일단 인물은 아니다. 종종 나이가 들면서 가슴이 따뜻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품어야 할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물은 따뜻함에서 자라나지 않는다. 인물은 광야에서 자란다. 거친 광야에서 인물로 자라서 나온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인물은 결코 온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삼일교회 담임목사>

by 로스 | 2009/05/28 07:3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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